뜨거운 열풍이 한반도를 훑고 지나갔다. 2002년에 이은 두 번째 현상이다. 전국은 들끓었고, 광장을 되찾은 사람들은 모처럼 강한 일체감에 빠져들며 환호했다. 그것은 통쾌한 일탈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국민적 자긍심을 또다시 과시한 열광의 행렬이라며 뿌듯해했다. 다른 일각에서는 극단적 쏠림현상을 보여준 광기의 모습이었다고 우려했다. 자유분방한 세대들이 연출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고 자랑스러워한 쪽도 있었고, 무의식에 깊숙이 뿌리내린 심리적 반영이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노골적으로 끼어든 상업주의의 소산이라는 견해 또한 그 나름의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어느 것이 전적으로 맞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조금씩 맞을 수도 있고 조금씩 틀릴 수도 있다. 월드컵대회 기간에, 특히 한국대표팀의 경기가 있던 날에 온 국민이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열정적 응원을 보낸 것만은 사실이다. 이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향해 동시에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는지 모른다.
서울시청앞, 상암경기장 등 전국의 광장에는 붉은 인파들이 경기가 열리는 하루 전날부터 몰려들었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연호했다. 경기시간 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겅중겅중 뛰며 신명을 만끽했다. 그것은 사회적 규제와 질서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하는 해방과 카오스의 체험이기도 했고, 일상에서 느껴보기 힘든 짜릿한 엑스터시와 카타르시스의 한마당이기도 했다.
새벽 경기가 있던 날은 밤을 꼬박 세운 사람들이 아파트를 들썩이며 환호성과 한숨소리를 내질렀다. 오토바이에 태극기를 펄럭이며 달리는 통닭 배달부는 신바람이 난듯 골목을 곡예운전하면서도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걸 잊지 않았다.
무엇이 이들을 뜨거운 열기로 내몰았을까. 붉은 광장을 만들어 스스로 그곳에 풍덩 빠져버린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들을 광장으로 내몬 보이지 않는 손은 어디에 있는 걸까.
◇열광의 주인은 뇌
열광은 물론 몸이 한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머리 안에 있는 뇌가 한다. 뇌는 크게 변연계와 신피질로 나뉘는데, 포유동물에 와서 발달해 '포유류의 뇌'로 불리는 변연계는 정서적 교감이 주요 임무이며 기쁨, 고통, 분노 등 감정을 처리한다. 변연계를 둘러싼 신피질은 계산, 추리, 판단 등을 가능케 한다. 즉, 인간은 변연계와 신피질의 밀접한 상호작용으로 감정을 세련되게 처리한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은 변연계 내의 작은 부분인 중격핵이나 편도체 때문이다. 변연계는 감정뿐 아니라 기억과도 관계가 깊은데, 해마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붙잡아두는 기억의 창고 역할을 한다.
2002년 월드컵의 뭉클함을 가슴에 간직해뒀다가 이번 월드컵에서 환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덕분이다. '춤추는 뇌'의 저자 김종성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과장은 "기억과 감정 중추인 편도체와 해마가 변연계에 나란히 자리하는 이유는 두 기능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울시청앞 등의 열렬한 함성과 행동은 변연계가 주도하는 가운데 변연계에 가까운 신피질의 일부가 여기에 합세해 나타난 경우라는 것이다.
◇축구의 원시본능
신피질보다 더 오래된 변연계를 이해하는 것은 축구의 정체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축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번성한 스포츠로 꼽힌다. 국적, 인종, 성별, 민족, 종교, 신념을 뛰어넘어 인류 최고의 놀이로 각광받고 있다. '제3의 길'로 유명한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세계화란 곧 축구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축구는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는 스포츠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는 "축구는 종교요, 전쟁이다. 축구 의식은 종교 의식과 매우 비슷하다. 경건과 열광이 교차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을 빠지게 하는 '광기'의 요소가 함유돼 있다는 것이다.
축구는 그 기본 구조가 인류 수렵시대의 사냥과 흡사하다. 즉, 사냥꾼 회로를 담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시작을 알렸던 손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한다. 골키퍼를 빼고는 거의 손을 쓰지 않고 인체 중 가장 둔한 발로만 목표를 성취하려 한다.
경기모습은 동물을 잡기 위해 들판을 내달렸던 야생수렵시대의 우리 선조를 떠올린다. 축구는 야생동물을 은유하는 축구공을 향해 줄기차게 돌진하며 이를 이용해 골문에 차 넣는다. 장원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생명을 걸지 않고도 사냥이라는 행위와 충분히 유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사냥에 성공하면 우승컵과 명성과 환호, 즉 문명화된 고깃덩어리를 손에 넣는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축구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한 원시본능을 일깨우는 스포츠인 것이다. 장 교수는 저서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에서 "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장구한 세월동안 인류문명의 중심회로로 기능하던 사냥꾼 DNA가 농경문화의 도입 이후 그 존립근거를 잃고 공중에 붕 떠버렸다"고 말한다.
◇월드컵의 마력
축구가 인간의 원시본능을 깨워주기 때문에 환호작약하는 인기를 누린다고 해서 설득력을 다 갖췄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프로축구팀이 벌이는 K리그는 이렇다할 관중을 모으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번 월드컵 대표팀이 "다음 월드컵의 선전을 위해서라도 국민들이 K리그에 관심을 보여 달라"고 하소연할까. 어떤 K리그 경기는 관중이 1천 명도 채 오지 않는다고 한다.
비결은 축구문화의 정점인 월드컵대회 자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축구의 본질인 원시적 엑스터시와 카타르시스를 바로 월드컵이 갖고 있는 것이다. 같은 국제 축구인 데도 올림픽 축구가 별로 인기가 없는 것은 23살 이하의 선수들로만 참가를 국한시켜 그 효과를 떨어뜨리고 있는 반면 월드컵을 제한을 두지 않고 그것을 최대한 살린다.
월드컵 축구는 변명과 회피가 통하지 않는 사생결단의 장에서 칼을 맞대고 숨가쁘게 부딪치는 격돌의 장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장 교수는 "승부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월드컵을 대체할 만한 어떤 이벤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월드컵은 참가국들이 지름 22cm, 무게 450g의 둥근 물체로 자신들이 우수한 국가의 우수한 국민임을 과시하는 데 활용된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축구를 통해 자신들의 잠재력이 적지 않음을 안팎에 자랑하려 하며, 우리 한국도 어려움을 딛고 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재기했음을 자신과 국제사회에 인정받으려 한다.
◇자긍심의 투사
자신의 존재를 내외에 확인시키려는 동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함으로써 스스로 대견해하려는 욕구가 숨어 있다. 우리 민족의 경우 사회 구성원들이 모여 밤새 춤추고 노래하는 축제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대동굿 등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엑스터시에 빠져들었는데, 이 축제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과정 등을 거치면서 상실됐다. 그 빈 공간을 종교집회나 정치집회가 대신 메워왔던 것.
이는 잃어버린 광장에 대한 그리움이자 자신의 본령을 되찾으려는 열망으로 응결돼 나타났다. 특히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에 가입해 선진국 클럽에 들었다며 기뻐한 지 불과 얼마만에 곧바로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를 당했던 한국인으로선 구겨진 자존감을 회복할 자리가 필요했다.
그 계기가 바로 2002년 월드컵대회였다. 월드컵 사상 첫승을 넘어 16강, 8강, 4강으로 거침없이 치달으면서 우리 국민은 승리의 체험을 함께 나누며 잃어버렸던 민족적 자존감과 공동체의 동질감을 극적으로 확인했다. 그 기억은 한민족의 뇌리에 매우 강렬하게 남았으며 이는 이번 월드컵의 열정적 응원으로 나타났다.
함영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는 "21세기 한국인의 상징이 돼버린 붉은악마가 주축인 젊은 세대는 세계 경제 10위권까지 올라간 '코리아 파워'에 대한 자부심, '우리도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하다"며 "일사불란하되 개인주의적인 이들은 경기가 끝나면 그들은 각자 개인으로 돌아가 자기 생활을 즐기고 개성을 살린다"고 설명한다.
◇심리적 해방
월드컵에 대한 열정을 놀이문화의 부활과 세대간, 계층간 단절 해소의 계기로 활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칼로 자르듯 차가운 디지털 시대에 각기 고립분산돼 있는 세대들이 모호하지만 따뜻한 아날로그 시대에서 다시 만나려는 소통과 공감의 소망이 짙게 투영돼 있다는 견해도 있다. 서열과 규범 중심의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표시라는 주장 또한 일리있는 분석이다.
한규석 전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월드컵 공동응원은 대등한 놀이문화에 대한 집단적 갈구라고 풀이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 중심이 된 것은 억압된 서열구조를 타파하고 위와 아래가 같이 소통할 수 있는 어울림의 해방공간을 꿈꾸고 있다는 것. 일상의 사회구조에서 잠시나마 일탈하는 것은 축제일에는 신분과 계층을 초월해 한데 어울렸던 전통의 축제와 맥이 닿는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2002년에 처음 확인했고 그 추억을 이번 월드컵에서 재현코자 했다는 것이다.
놀이 문화의 부활에서 해답을 찾기도 한다. 근면, 성실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근래들어 한국사회를 지배해왔는데, 21세기 들어 재미와 놀이의 중요성에 다시 눈뜨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 교수는 놀이의 주된 기능으로 '카타르시스'를 꼽으면서 부정적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놀이와 축제를 통해 삶의 주인이 되고자 열망하며 이번 월드컵은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존 지배질서에 대한 간접적 저항은 10대와 20대 여성이 길거리 응원의 주축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축구공을 만져본 적도 없는 이들 여성은 월드컵대회를 계기로 마련된 광장에 모여들어 주류 남성사회에 억압당하고 소외돼왔던 자신의 존재를 맘껏 드러내면서 주체성을 확인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미디어와 상업주의 이번 월드컵에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 이면에 미디어의 집중 공략과 기업의 끈질긴 상업주의가 있었음도 부인하긴 어렵다. 일부 방송과 신문들은 월드컵 한 달 전부터 국민의 관심을 불러 모으기 위해 보도를 집중적으로 쏟아냈고, 기업들은 마케팅 효과 극대화에 열을 올렸다.
예컨대, 방송의 경우 3월 1일 국가대표팀의 앙골라팀과의 평가전 때 지상파 3사가 동시 생중계한 뒤 뉴스시간에 월드컵 뉴스를 일제히 내보냈다. 이날부터 13일까지 방송 3사가 내보낸 월드컵 뉴스가 무려 100건에 달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월드컵 개막 한 달을 앞둔 5월 10일에는 모두 47건의 관련보도를 방송 3사가 메인뉴스시간에 편성했다. 대회기간에 중복동시중계가 빈번히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2002년 월드컵 기간에 1천300억원대의 광고수입을 올린 이들 방송은 월드컵 특수로 800억원의 수입을 기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사와 포털사도 월드컵 붐 조성에 적극 나섰다. 한 신문과 포털사는 '광화문에서 열광하라'는 강렬한 문구의 깃발을 세종로 일대에 내걸어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언론보도도 경기를 더할수록 전투적이고 선정적인 제목을 내놨다. '무적함대 스페인' '전차군단 골폭탄' '붉은 전쟁' 등은 그나마 점잖은 편. 일부 신문은 '스위스, 부숴주마' '박지성, 佛 기절시키다' 등으로 강도를 높였다.
이동통신사를 중심으로 월드컵 마케팅 효과의 극대화를 꾀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SK텔레콤의 경우 2002년 월드컵 행사에서 500억원 이상의 광고효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에도 서울 도심의 주요 응원현장의 사용권을 활용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시 말해 엄청난 보도홍수와 광고공세 속에 시민들이 온전히 평상심을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영석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집단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집단주의 문화에 몰입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이번에도 나타났다"며 "축제 자체가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는 언론과 업체에 의한 기획화의 성격이 강하며 이로 인해 일종의 심리적 마비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열광, 그 이후 한국대표팀이 스위스에 패한 뒤의 풍경은 이전날과 사뭇 다르다. 서울시청앞 등 붉은 인파가 들끓었던 광장은 텅 빈 채 푸른 잔디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뜨거운 함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동차들의 소음과 같은 일상이 모습을 되찾았다. 하루 사이에 펼쳐진 풍경은 경이로울 정도로 대조적이다.
열기를 고조시키는 데 앞장섰던 언론들도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독려한다. 성, 지역, 계층을 떠난 국민통합과 축제분위기는 그 학습효과를 십분 살려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도록 하자는 목소리 역시 높다. 한규석 교수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단순한 동조현상 차원을 훨씬 뛰어 넘는 이번 응원열기는 4년 전에 처음 얻었던 놀이경험을 재현한 것이었다"면서 "이를 잘 살려내어 건강한 21세기의 한국사회로 나아가는 데 디딤돌이 되면 좋겠다"고 소망을 피력한다.
월드컵의 응원은 끝났다. 그러나 독일 월드컵의 명승부는 지금부터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실력을 자랑하는 세계적 강팀들이 16강과 8강전, 4강전을 차례로 치르며 축구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이제 우리 축구팬들은 애국주의 부담 등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즐기는 스포츠로 축구를 차분히 만끽할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스포츠를 스포츠의 본래 자리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을 앞으로 더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승패에 집착하고 여기에 경기 외적 열망을 지나치게 투영시키면 그로 인해 겪게 되는 후유증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올인'은 '올아웃'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형두 / 연합뉴스 편집위원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