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월드아이닷컴=심현석 기자]세월이 흘러도 위상이 흔들리지 않는 작품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 1995)’가 바로 그런 영화다. 개봉된지 10년이 넘었고 이후 유사한 스릴러물이 무수히 쏟아져나왔지만 이 영화는 ‘반전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하며 영화팬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특히 주연 케빈 스페이시가 절룩거리다가 태연히 발을 펴며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반전코드에 익숙치 않았던 그 당시 관객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원래 의미는 ‘용의자’를 뜻하는 경찰용어지만 지금부터는 영어단어의 개별적 의미를 차용해 ‘일상적 의심’이나‘의혹’으로 바꿔쓰기로 한다.
딕 아드보카트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27일 한국을 떠났다. 대표팀이 귀국한지 이틀만의 행보다. 영화로 치자면 엔딩 크레딧이 거의 다 흘러 검은 화면이 보이기 직전쯤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는 떠나며 “한국에서의 9개월이 행복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민의 78%(한국갤럽조사)도 6월 한달 ‘월드컵으로’행복했다고 답했다. 하지만‘월드컵으로’ 대신에 ‘아드보카트로 인해’를 같은 위치에 삽입해도 결과는 동일할까. 그래도 행복했다면 과연 무엇이...어떤 부분이 행복한걸까. 논의될 ‘일상적 의혹’의 객체는 다름 아닌 아드보카트다.
◎ ‘성취동기의 문제’…강요할 순 없었지만...?
학창시절 등장했던 용어중에 ‘성취동기’라는 것이 있다. 동기의 강약(强弱)이 개인의 학습이나 행동을 규정, 결국 성취동기와 높은 성과가 정비례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점에서 아드보카트에게 강한 성취동기를 기대하긴 처음부터 무리가 있었다. 소위 ‘할 만한 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탓이다. 한국은 당시 잇따른 부진으로 침체기를 겪은데다 쿠엘류와 본프레레가 떠나 빠른 시일내에 완성된 팀을 만들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아드보카트로서도 굳이 한국행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자칫 자신의 네임 밸류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고 수익적인 부분에서도 그에겐 그다지 매력적일 순 없었다.
그러나 한국축구는 이 세계적인 명장을 긴급수혈하는데 성공한다. 바로 확보된 월드컵 본선 진출권 때문이다. 이것은 아드보카트가 UAE와의 계약을 두 달만에 파기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데 결정적인 매개체가 됐다. 기자는 이 상황을 지난글(6.9일‘2006 한국축구 4년전과는 다른 3가지 압박감’)에서 아드보카트의 ‘무임승차’라고 다소 파격적으로 표현했다.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월드컵에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땀을 흘리고 연구하며 치열한 경쟁을 하는가. 한국축구는 두 명의 감독을 돌려보내는 진통끝에 힘들게 월드컵 입장권을 움켜쥐었지만 아드보카트는 이를 얻는데 단 1%의 기여도 하지 않고 손쉽게 ''월드컵 묻어가기''에 안착했다.
이런 아드보카트에게 한국은 얼마나 강렬한 성취동기를 그에게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이 아닌 이상 외국인 감독에게 애국심까지 바라는 것은 넌센스라 할지라도 4년전 히딩크의 투영 때문에 우리는 그가 ‘제2의 히동구’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아드보카트와 한국축구의 첫 만남은 서로의 이해관계는 맞았을 지라도 한국으로서는 입장이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위치였다. 결국 나중에 밝혀진 그의 계획은 월드컵이 시작되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갈 보따리를 미리 싸놓는 것이었다. 그는 이 러시아행을 마지막까지 부인했다.
◎ 유로 2004 체코전=독일 월드컵 토고전…아드보는 새가슴?
“전반은 스위스가 지배했고 후반은 우리가 지배했다” 스위스전 패배후 아드보카트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이말을 언뜻 들을땐 전·후반을 2등분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월드컵 3경기 전체를 놓고 봤을때 이것이 한국의 동일한 흐름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반전에 몸이 덜풀려 후반에 살아나는 간헐적 모습이 아닌 매경기 유사한 패턴이었다. 슈팅과 날카로운 공격은 전반전에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베켄바우어는 “한국이 전반전에 파업한 줄 알았다”는 의미있는 농담까지 던졌다. 초반부터 움츠려들다보니 결국 모두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는 경기를 했다. 이를 뒤집는 것은 선수들에겐 그만큼 부담이었다.
사실 아드보카트는 ‘토털사커’의 창시자인 리누스 미헬스 전 네덜란드 감독의 후계자로 공격을 지향한다고는 하나 모험을 싫어하고 ‘안정 지향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지난 유로 2004 네덜란드와 체코의 경기였다. 당시 네덜란드 사령탑이었던 아드보카트는 전반에 두골을 먼저 넣고 기세를 올렸으나 수비를 강화하다 2-3으로 충격의 역전패, 그의 지도력은 전 세계인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고 광적인 축구팬의 살해위협까지 뒤따랐다. 물론 한 두경기의 내용으로 그가 이룬 기존의 업적 전체를 깎아내릴 순 없다. 그러나 이 경기를 기점으로 공교롭게도 그는 4강전 포르투칼전 패배 등이 이어지며 결국 같은해 7월 감독직을 사임, 이후 독일의 보루시아 MG로 옮겼지만 성적부진으로 조기에 물러나 지도자로서 내리막을 걷게된다.
이런 쓰라린 비운이 토고전에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이 경기에서 2-1로 승부를 뒤집은 뒤 토고 수비수가 퇴장당해 수적 우위에 있었음에도 프리킥을 포기하며 소극적인 수비축구로 일관했다. 관중석의 야유가 이내 국제적인 전파를 탔다. 경기가 끝나고 승점 3이냐 플러스 알파 골득실까지냐의 가치비중은 결과론의 과제로 넘어갔지만 스위스가 토고전에서 1-0으로 앞서면서도 공격에 비중 두다 중요한 추가골을 성공한 장면은 묘한 오버랩을 일으켰다. 토고와의 첫경기는 한국민들에게는 4년간의 4강 신화 갈증이 최정점에 올라와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 이에 그는 목마른 한국인들을 위해 일단 원정 첫승으로 급한 방패막이를 친 것은 아닐까. 프랑스전이 끝나고 “이기는 게 중요하다. 1승1무 기록은 나쁘지 않다”며 16강진출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성적에 스스로 만족했던 모습은 연장선은 아니었나.
◎ 갈피를 못잡은 포백과 스리백...전력 낭비? 정력 낭비?
소제목 그대로다. 무수한 수비라인의 실험과 샐 수 없는 논의들. 4백을 포기하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정작 토고와의 전반전 그는 스리백을 썼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리백과 포백을 병행했다면 어땠을까. 불안해서였나. 작전은 경기상황에 따라 변용될 수 있는 거라면 할말은 없다. 하지만 그동안 전술을 익히기 위해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은 어떻게 되는 건가.
◎ 모든 논란은 오심속으로...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스위스전 한국축구는 스포츠사에 남을 만한 오심파동에 휩싸였다. 만약 그날 한국이 0-1로 패함과 동시에 16강 진출이 좌절됐다면 아드보카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프랑스가 2-0으로 토고를 앞서며 스위스전 경기종료는 15분여를 남긴 절박한 상황, 한국은 마지막 힘을 다해 몰아붙였고 2002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여러차례 나왔다.
여기서 오프사이드 오심사태가 터졌다. 이 시점이 정말 묘했다. 경기는 0-2로 한국이 패했고 격노한 한국민은 이 이상한 판정을 샌드백으로 그동안 느꼈던 모종의 응어리와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분출했다. 그사이 감추어져 있던 논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어설픈 판정하나로 깔끔하게 희석됐다. 한국 16강 진출 좌절의 원인을 부심이 올린 깃발 하나가 장렬하게 떠안았다. 경기가 0-1로 끝났다면 아드보카트로서도 질타와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하지만 오심여파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입국날 그는 태극전사들의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공항에서 혼자 환한 웃음을 띄며 스스로 박수까지 쳤다.
◎ 한국축구를 무시하는 아드보카트?
아드보카트는 그동안 선수들을 여러차례 격려하고 이들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낀다며 한국의 응원문화 역시 높이 평가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작은 장군’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목표는 우승”이라는 호방함도 뒤따랐다. 그러나 변질된 모습이 나타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소요소에 본심을 드러내는 듯한 위험수위의 발언이 이어졌다.
“노르웨이전 평가전 무승부를 대서특필해 달라”며 수상함의 복선을 깔더니 월드컵 본선에 와선 프랑스전이 끝나고 tv인터뷰에서 한국을 ''변방의 축구소국''으로 표현했다. ‘소국’ 한국이 ‘축구강국’ 프랑스와 비겼으니 만족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만족을 강요한다는 느낌마저도 받았다. 스위스전을 앞두고도 뉘앙스는 다르지 않았다. ‘수비적’이라는 기자들의 지적에 흥분하며 “현실적으로 한국이 무슨 세계적인 팀이라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느냐”며 불쾌한 반응을 나타낸 것.
놀랍게도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는 “운이 없었다. 2002년의 행운이 이번에도 있었다면 충분히 16강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4년전 한국의 성과와 4년후 현재의 한국축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운에 좌우됐다라는 평소의 속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나는 한국에서 왕처럼 대우받았다”라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떠나기전 마지막 멘트는 결국 “2002년 멤버들의 기량은 전혀 늘지 않았다”는 쓴소리로 장식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한국에 있으면서 단 한차례도 패배의 책임이나 16강 좌절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거나 한국민을 실망시켜 유감이다 내지는 죄송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을 듣는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팀을 이끌며 스스로 대표팀을 낮추는 행동은 감독으로서 그가 가진 책임의식의 진정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한다.
사실 한국인은 정에 약하다. 떠난 사람은 맘 편히 보내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반면 혹자들은 세계적인 논문이 조작으로 밝혀지고 감동의 지하철 결혼이 자작극이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대표팀 감독자리는 비난의 불가침영역이고 새롭게 출범하는 베어벡호에 어울리지 않는 논의로도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9개월 모든 한국민과 태극전사들은 어선의 선원으로 열심히 땀을 흘렸는데 정작 그 배를 이끄는 선장이 과연 고기를 잡을 생각이었는지 유랑이나 떠날 모습이었냐는 분명하게 구분 지을 필요가 있다. 그 배는 선장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아드보카트호’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 앉아 다리를 편하게 폈을까.
스포츠월드아이닷컴 심현석 기자 (hssim@segye.com)
샬롬~
